두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 창원 외곽에 있는 시골 동네에 살았다. 그린벨트에 묶여있을 정도로 발전이 더딘 곳이었고, 옆 동네라고 해봤자 5Km 거리의 바닷가 마을이 전부였다. 3학년 때쯤에는 바닷가 마을의 초등학교가 폐교가 됐다. 그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은 우리 학교로 보내졌다. 전학 온 친구들과는 금방 친해졌고 그해 여름에는 바닷가 마을로 물놀이도 갔다. 친구 몇 명과 함께 바닷가 동네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버스는 30분이 되도록 오질 않았다. 더위에 지친 나와 친구들은 버스 정류장 위의 빨간색 대교에 올라가 엄지손가락을 들고 히치하이킹을 했다. 젊은 아저씨 두 명이 탄 빨간 티코가 멈춰 섰다. 아저씨들은 허허 웃으면서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는 건 위험한 일이니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한 후 우리를 태워줬다. 아저씨들은 바닷가 마을의 입구에서 우리를 내려줬다. 친구 집에 가기 위해선 해안도로를 한참이나 더 걸어야 했다. 해안도로 오른 편에는 까만 바다가 아스팔트 바닥처럼 깔려있었다. 우리는 해안도로 아래로 내려가 걸으면서 바다와 모래와 해파리를 구경했다. 친구는 습관처럼 투명한 해파리를 꾸욱꾸욱 밟았다. 해파리는 뭉개져서 자갈과 모래 사이로 섞여들었다. 친구 집에 도착해서는 앞마당의 얕은 우물에 발을 넣고 물장구를 쳤다. 친구 아빠한테 혼이 났지만 또 몰래 발을 넣고 흔들었다. 점심으로는 우리가 사 간 육개장과 김치 사발면을 먹었다. 밥도 말아먹었다. 뜨거운 날에 뜨거운 국물과 뜨거운 밥을 먹으니 땀이 흘렀다. 친구는 냉장고 구석에 있던 오렌지 맛 환타를 꺼내 컵에 따라줬다. 컵라면 국물 맛도, 그 속의 밥알 맛도 가물가물하지만 환타 맛 만큼은 아직 선명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일요일마다 가족과 함께 당일치기 여행을 다녔다. 여행지는 주로 경상도 내에 있는 유명 관광지나 절이었다. 통도사, 표충사, 태종대, 석굴암, 불국사, 수로왕릉, 지리산 노고단. 지리산 여행을 한 날에는 화개장터에서 밥을 먹었다. 나는 부모님이 시켜준 선지국밥을 시원하게 먹었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좋아했다. 선지국밥을 배가 터질 정도로 먹은 후에는 시장 구경을 했다. 흙바닥은 노랬고 하늘 색깔도 노랬다. 그때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차를 탔을 때엔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귀로는 엄정화의 '배반의 장미'를 소개하는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왜인지 '배반'을 '백반'으로 착각을 하고선 엄마한테 '백반'의 뜻을 물었다. 엄마는 흰 쌀밥이라고 대답했다. 머릿속에선 장미꽃잎이 올려 져 있는 흰 쌀밥이 떠올랐다. 자동차 바퀴가 굴러감에 따라 멀미는 심해졌고 동시에 머릿속의 장미꽃잎은 뭉개졌다. 계속되는 멀미에 어질어질해질 무렵 머릿속의 장미는 완전히 짓이겨져 밥과 섞여있었다. 결국엔 토를 했다. 게워낸 선지국밥은 머릿속의 장미 비빔밥과 닮아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입을 헹궜고 입가심을 하기 위해 유리병에 들어있는 오렌지 맛 환타를 마셨다. 토 맛과 환타 맛이 섞였다가 나중에는 환타 맛만 났다.
내 기억 속의 90년대는 노랗다. 왠지 유리병으로 된 환타 오렌지 맛 같다. 오늘 마신 트로피카나 스파클링 오렌지 맛에서는 90년대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