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04

2015. 6. 4. 17:38 from 하루 낱말

 늘 느끼는 건데, 내 시간 감각은 비정상적이다.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된다. 지난 주 분명 증명사진을 찍고 일자리를 구하리라 다짐해놓고선 무책임하게 일주일을 흘려보냈다. 가만히 바깥을 관찰하고 멍하니 안을 방관하다 보면 내가 감각하는 시간과 실제 시간 사이의 틈이 벌어진다. 혼자서 인터스텔라를 찍는 것만 같다. 내 별은 밀러 행성에 가깝겠지. 몸과 정신이 이렇게나 무거운 걸 보면 중력이 엄청난 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중력만큼 시간이 몇 배씩 고이는 거고.


 오늘 드디어 증명사진을 찍었다. 어제 알바몬에서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발견한 탓에 실행력을 짜냈다. 시립 미술관 스텝 일인데, 근무 시간이 빡센 걸 감안하더라도 보수가 정말 셌다. 갑자기 반쯤 포기하고 있던 인도 여행이 떠올랐고, 아예 포기하고 있던 노트북도 떠올랐다. 꿈만 꾸던 각종 피규어랑 투톤 염색도 떠올랐다. 망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증명사진은 적당히 밝게 잘 나왔고, 집에 오자마자 이력서를 휘갈겨 썼다.


 이력서를 쓸 때면 늘 인생을 헛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격증도 없고 토익 점수도 없고 학력도 중퇴 하나에 휴학 하나. 나이에 비에 한참 비어있어서 칸을 채우기가 민망하다. 인턴 하는 애들이 나보다 두세 살은 어린 애들일 텐데, 같은 생각이나 하면서 엄청난 중력으로 자존감을 낮추다가 꾸역꾸역 필수 항목을 채웠다. 그래도 미술관 스텝 경력이랑 미술대학 재학 경력, 미술 관련 학과 재학 경력을 쓰면서 단기 알바에 이 정도면 써 줄만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실용도 제로에 쓰잘데기 없는 대학 간판 이럴 때나 써먹자 하는 생각도 했고. 이력서를 마무리하자마자 담당자한테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알바몬 채용정보 보고 전화했는데요, 전시 안내직 지원 온라인으로 이력서만 보내면 되나요? 돌아오는 담당자의 대답은, 아, 그거 이미 다 뽑혔어요.


 모집 종료일은 6월 6일이었는데 역시 마감 날짜는 그냥 칸 채우기 용도일 뿐. 달리 탓할 사람도 없고, 그냥 게으른 내 탓이나 해야지.


 어찌됐든 노트북이랑 피규어는 망상으로 끝내는 걸로. 뭐든 초반 망상 단계가 제일로 행벅한 거니까, 행벅한 시간 보내면서 자위한 걸로 만족해야겠다. 이젠 커피숍용 이력서를 새로 써야지. 제목은 ‘커피와 요리를 좋아하는 휴학생입니다,’ 같은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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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SIK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