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려 누운 몸 위로 이불을 덮은 뒤 이불과 바닥을 박음질로 꿰매어 붙이고 싶다.
어제 오랜만에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병원에 오지 않은 이유를 딱히 추궁하지 않았다. 지난번 의사는 오랜만에 갔을 때 혼을 냈는데, 이번 선생님은 안 그랬다. 다만 “수라 씨 같은 분들은 약을 잘 먹어도 간당간당하기 때문에 절대 빼먹지 말고 꾸준히 잘 먹어야만 해요.”하고 말했다.
<필경사 바틀비>와 허연의 <오십 미터>, 그리고 플라톤의 <향연>을 샀다. <오십 미터>는 반 정도 읽었고, <향연>은 아리스토파네스 부분만 읽었다. <필경사 바틀비>는 다 읽었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가 뭔가를 거부 방식은 굉장히 특이한데, 그건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추가하는 식의 거부가 아닌, ‘하겠다’를 포함한 모든 의지를 제거하는(혹은 의지가 제거된) 식의 거부다.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권은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삼키지 않는 것. 그것뿐. 택하는 게 아니라 택하지 않는 것에 가까운 거부. 소설에 등장하는 시점에서의 바틀비에게는 한 종류의 생밖에 남지 않았다. 바틀비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던 거다.
핵심이 되는 대사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부분은 번역본 별로 상당히 다른 뉘앙스를 가지는데, 타 번역사의 “저는 안 하고 싶습니다.”보다 내가 읽은 문학동네 버전 쪽이 더 강렬한 것 같다. 선택권이 없는 사람의 선택이라니. 바틀비의 아이러니가 폭발하는 느낌.
결말부에서 바틀비는 죽게 되었지만 그의 생은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 이전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정서적인 시체. 정서적 사후경직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읽어낸 후 계속 떠오르는 건 임종 시의 바틀비의 눈이다. 그는 왜 눈을 뜨고 죽어야만 했을까.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아빠로부터의 시달림, 코끼리로부터의 시달림, 학교로부터의 시달림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낸 적이 있다. 일부러 안 먹은 게 아니라, 당시의 나에게는 먹는 것을 포함한 모든 의지가 상실된 상태였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라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주변에서 사람을 없애고, 일상도 없애고, 음식물도 없애는 식의 생활. 누군가는 이걸 ‘수동 공격성’이라고 표현했지. 바틀비의 이상한 ‘선택’을 정신분석학적으로 가져가는 인간도 아마 있을 거다. 나는 그쪽 지식이 부족하니깐 누군가가 잘 풀어서 써주면 좋겠다.
상태가 안 좋을 때에는 자살 생각이 많이 난다. 오늘도 몇 번이고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겁이 많은 인간이므로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안다.
명작읽기 선생님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처럼 수강 신청에 실패해서 추가로 받아달라는 인원이 많긴 한데, 그래도 꼭 듣고 싶다면 첫 수업에 오라고. 이걸로 금요일 6시간 연강 확정이다. ‘인형과 대안공간‘은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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