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05 밀린 일상

2015. 11. 5. 02:55 from 하루 낱말

 노트북 뚜껑은 한 번 여는 게 어렵다. 몇 주 전부터 밀린 글을 빨리 써야지, 써야지, 써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그냥 생각으로만 끝냈다. 이유는 모르겠다. 무기력했다. 일기를 정확히 언제까지 썼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대충 한 달은 된 것 같다. 갑자기 투데이가 80인가 90으로 올랐던 날, 유입 검색어는 수업 필수 연극 제목이었고, 그날은 레포트 제출일이었고, 유입 횟수에 비에서 방문 횟수는 너무나도 높았고, 한 명이 50번 이상 들어왔거나, 블로그 주소가 몇 몇 사람들에게 퍼졌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설명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180개 정도 되는 글을 다 비공개로 돌려버렸다. 딱히 못할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내가 가감없이 싸지른 배설물들이 나를 아는 누군가에게 읽히는 게 싫었다. 나에 대해 절반 정도만 아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게 불편하고 무서웠다. 


 그 후로는 생각 없이, 다시 올라가는 과정 없이 오직 감각으로만 휘갈기는 배설물들을 종종 썼는데, 그것들 또한 블로그에다가 옮기기는 귀찮았다. 핸드폰 메모장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투데이도 다시 잠잠해졌는데 왜 블로그에 글을 안 쓰고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비공개로 돌려놓은 게시물들을 다시 공개로 돌릴지는. 이것도 모르겠다. 


 쓸 말이 많았는데 기억이 안 난다. 


 오늘은 생리통과 명치어택 때문에 학교를 안 갔다. 한 달 전에는 '못' 갔는데 오늘은 '안' 갔다. 4시 쯤, 몸을 일으켰을 때는 학교를 안 갔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조금 있다가는 선택권이 생길 정도로 좋아졌다는 사실에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 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먹을 때마다 악몽을 꾸게 되는 하얀 신경안정제도 같이 받아왔는데 먹기가 싫다. 오늘 잠을 잤을 때 또 악몽을 꾸게 되면 그 약은 빼야겠다. 


 핸드폰 액정이 깨졌다. 졸전 제작을 도우러 제작소에 갔다가 목장갑 낀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는 도중에 떨어트렸다. 깨진 핸드폰 액정을 보니깐 그냥 짜증이 났다. 상명하복식으로 하사받은 제작 일정 때문에 제작소에 있었다는 것도 짜증났고, 핸드폰을 갖고 나가기가 싫어서 등교 20분 전까지도 충전을 안하고 있다가 단톡 공지 때문에 억지로 갖고 나왔다는 게 생각나서 또 짜증이 났다. 그냥 과 활동에 대한 불만이랑 다 섞여서 짜증이 났다. 내껀 왜 맨날 깨질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비약이 내 사고를 더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걸 알아서 짜증이 났다. 지금은 그냥 핸드폰을 잘 안 본다. 그러면서도 매달 6만원 정도의 요금이 나가는데, 그래도 3GB의 데이터는 다 써줘야 본전을 뽑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또 짜증이 난다. 길 걸으면서 팟케스트나 음악 원 없이 들어야겠다.


 상담을 다시 시작했다. 3주차 진행 중인데 그래도 지난 번 상담보단 조금 낫다. 말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조금 자유로워졌다. 블로그 덕이 크다. 지난 주에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 강제추행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일상적 사고와 싸우는 강박적 사고에 대해서도 편하게 말했다. 자살 충동도 편하게 말했다. 내가 바보 같다는 것도 편하게 말했다. 멀쩡해 보이고 싶다는 욕구 없이 그냥 다 말했다. 멀쩡해 보이려고 끙끙 앓는 것 보다는 그냥 미친년이 되는 게 건강에 좋다.


 연극사 시험 공부는 재미있었다. 시험 결과는 모르겠다. 꽤 꼼꼼하게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것 같다. 토론 수업 답안지가 떠오를 때마다 쪽팔린다. 21세기 사회에 드러나는 비극성을, 그리스 비극의 한 작품을 예로 들어서 서술하는 문제였는데, 뭐 안티고네와 크레온을 예로 들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며 양 극단으로 치닫는 이분화된 사람들 솰라솰라 거리면서 개소리를 뱉었던 것 같다. 원인이나 이후의 해결책 같은 걸 더 예민하게 봤어야 했는데, 내가 쓴 건 그냥 존나 단순한 인간의 단순한 개소리. 시험이 끝난 후 집에 와서도 계속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해 봤는데 지금도 이상적인 답안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진 않는다. 원인이나 해결책을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로 설정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늘 크랍이 어렵다. 

 

 어제는 <더 랍스터>를 봤다. 깔끔하고 명확한 알레고리 영화라고 생각했다. 중반까지는. 커플 메이킹(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 강제되는 호텔, 동물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도태의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 호텔에서는 친구, 사냥터에서는 목표물이 되는 관계, 커플이 되기 위해 연기를 하는 사람들. 일련의 설정들은 별다른 설명조차 필요 없이 그냥 세상을 축약한 약도 같았다. 그러다가 주인공 남자가 들로 나온 이후로는 헷갈리기 시작. 들에서는 호텔에서와는 반대되는 기준이 적용되는데, 이건 우, 열의 문제가 아니고 윤리의 문제도 아니다. 호텔의 법과 들의 법, 둘 다 엉망. 아니, 애초에 세계 자체가 엉망. 이 엉망진창 속에서 주인공은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 됐지만 들의 법칙에선 허용되지 않는 짓이므로 꼭꼭 숨긴 언어로 사랑을 말한다. 손짓으로, 몸짓으로, 발짓으로. 무릎을 굽히고 벌러덩 누으면서 뱉은 사랑의 언어들은 병신 같으면서도 아름다웠다. 각자의 씨디 플레이어로 재생시간을 맞춰 듣는 것도. 전체적으로 감정을 제대로 보여줄 법한 부분에서는 건조하게 흘러가고, 주인공이 시련을 겪을 만한 부분에서는 반대로 평탄하게 흘러가는 식이었는데, 이렇게 뭔가 무책임한 듯하면서도 의외의 부분에서 힘주는 연출도 존나 마음에 들어. 꼭 토가시 만화 볼 때처럼 좋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솔직히 모르겠다. 극장 안에서는 당연히 그 까만 화면이 남자의 시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여자의 시야일 거란 생각이 들고. 근시, 실명 등 '눈'과 관련해서도 생각할 게 많고, 전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게 많은데 나중에 DVD 나오면 또 봐야지. 호텔에서 누군가가 "동물이 된다면 뭐가 되고 싶느냐"고 물었을 때, 남자가 "랍스터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 장면이 떠오른다. 왜 하필 랍스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부터 알고 싶다. 

 

 이젠 리어왕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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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SIK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