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알바의 장점은 시간 대비 보수가 쎄다는 것. 단점은 장점을 제외한 모든 것. 무관심한 생을 사느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피켓을 오늘 처음으로 들었다. 피켓을 들고 홍보를 했다. 50프로 빅세일 중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둘러보시고 가세요. 목소리가 작다는 지적을 듣고서 목구멍이 쪼여들 정도로 소리를 쳤다. 내 앞으로는 예수쟁이 아줌마가 피켓을 들고 지나갔다.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광화문을 자주 오가던 시기에 피켓 든 사람들을 종종 봤다. 보라색 피켓을 들고 자기네 정당을 돌려달라던 아저씨들을 봤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서 직업을 돌려달라던 아저씨들도 봤다. 그때는 피켓이 몇 그램이든 몇 킬로그램이든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 피켓을 들고 흔들다가 내가 봤던 모든 피켓의 무게가 궁금해졌다. 팔이 아파서.
나는 10만 원을 얻었는데 그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걷고 흔들면서 뭘 얻었을까. 내 10만 원보다는 가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가도 동시에 그보다도 훨씬 가치 없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세상에서 제일 가시적인 거니까, 그 사람들이 얻어낸 것들도 내가 자주 얻는 것들처럼 희뿌옇고 형태 없는 것들일 수도 있잖아. 형태 없는 것들은 멋있어 보일 때가 많지만 한없이 구릴 때도 많다. 그 사람을 석방하겠습니다, 탕탕. 혹은 당신들을 모두 복직시키겠습니다, 탕탕. 같은 게 아니라면, 혹 다음 사람을 위해, 앞으로 생겨날 나쁜 반복을 막기 위해, 같은 말이 앞장 서고 있었다면 그건 정말로 유령 같은 거잖아. 내 10만 원보다 훨씬 희미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그냥 순수하게 자기만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훈장이나 꼬리표나 명함이나 피켓이나 혈서나 유서에 타인이 이용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여러모로 예쁘다.
진짜 어리고 무책임한 생각이지만 돈 걱정이 싫다. 돈을 벌 때면 돈을 제외한 모든 걸 잃는 기분이다. 돈을 벌면 물론 살 수 있는 게 많아지고 먹을 수 있는 것도 많아지지만 옷도 음식도, 난 딱히 없어도 살 수 있다. 한 달에 10만 원 이하의 식비로 이것저것 만들어 먹는 게 일상이고 그 일상에 딱히 불만이 없다. 물론 10만 원의 식비를 위해, 월세를 위해, 가스요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어야 하는 시기도 있다. 그럴 때면 살기 위해 죽어가는 기분이 든다. 모든 인생은 역설적이지만 내 인생에는 역설의 지점이 유달리 많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는데 이것 또한 역설을 추가하는 뻘소리에 불과할 걸.
스물두 살 때 인도 여행을 위해 세 달 동안 백화점 일을 했다. 주 5일 내내 일하고 가끔은 주말까지 땜빵을 뛰면서 한 달에 100만 원 정도의 돈을 벌었다. 간만에 통장 잔액은 세 자리를 찍었고 공과금을 내고 옷을 사고 맛있는 걸 먹었다. 가족들한테 유니클로 후리스도 뿌렸다. 대부분의 돈은 여행에 썼다. 기쎈 사람들 속에서 버티느라, 늙은 여중생들의 세력 다툼에 휘둘리느라 휘청거리면서도 이번 달만 버티면 비행기 티켓 값이 나온다, 며칠만 버티면 한 달 숙소 값이 나온다, 오늘 번 돈으로 뿌자를 띄우고 낙타를 타고 홍차와 짜이를 마시자, 새우 카레와 탄두리 치킨을 먹자, 하면서 버티고 버티고 버텼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리던 시기였다. 괜찮은 미래를 건져서 그닥 억울하진 않았지만 그 '현재'였던 시기엔 남은 게 별로 없다. 굳이 짜내자면 보다 복잡한 화가 묻어난 일기장, 화내면서 잘근잘근 씹은 김사과 소설들. 그거 말곤 기억도 안 난다.
폴 오스터가 생각난다. 빵을 위해 타자를 치던 사람. 나에게도 빵과 밥이 필요한데 난 뭘 쳐야 할까. 확실한 언어가 생기면 그 언어로 '밥 짓는 ㅇㅇㅇ'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만들어야지.
3월, 잠시 동안 과외를 할 때에도 계속 폴 오스터를 떠올렸다. 그땐 어줍잖게 능력 파는 일을 더는 안 할 거라 생각했다. 오늘은 어줍잖게 능력을 파는 일이 차라리 나은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장 당 오천 원을 받더라도 그림 그리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아무래도 답이 없는 것 같다. 자급자족 하면서 필요한 것만 소유하는 생활을 하고 싶지만, 또 막상 자급자족을 하면 불만을 만들어낼 거다. 흙은 비합리적이고 날씨는 부조리하다, 하면서.
아빠를 존경하진 않지만, 오히려 떠올리기만 해도 멘탈이 부서질 정도로 미워하지만, 그래도 30년 넘게 한 직장을 다닌 것에 대해선 존경스럽다. 힘들어도 일하러 가는 엄마 또한 존경스럽다. 엄마는 늘 쎈 사람이고 지쳐도 짜증 몇 번 내고서 일어나는 사람인데 살면 살수록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해 보인다. 나처럼 보이지도 않는 것 얻어내느라 골골대는 인간보다 훨씬 멋진 종류의 인간 같다. 그러나 또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 나를 무시하고, 바보 취급 한다는 걸 알기에 머리가 아프다. 내가 존경을 할 뿐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엄마 같은 종류의 사람들도 나를 이해 못 한다. 존경할 거리가 없으니 존경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고. 존중도 먼 세상 이야기.
언젠쯤이면 내 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원 전시회에서 1등을 해서 아이팟 클래식을 받았다. 그때 내 일로 보수를 받는 건 꽤 즐거운 일이구나, 생각했다. 앞으로도 내 일을 열심히 하면 세상은 나에게 보수를 주겠지, 하는 멍청한 생각도 했다. 아직 보수를 받을만큼 잘하는 게 없다는 게 첫 번째 문제이긴 한데 그만큼 어려운 문제는, 보수를 받기 힘들 정도로 실력이 없어도 어찌저찌 벌이를 이어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들 속에서 여러 기회를 얻어내고 배짱 좋게 혹은 뻔뻔하게 그 기회를 잘 이용해내는 사람이 많다. 그 과정에서 봐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기도, 잘한다 싶을 정도로 발전하기도 하고. 사회성 제로에 겁 많은 난 그런 사람들 보다 곱절은 잘해야 겨우 밥벌이를 시작할 수 있을 터. 안으로 파고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밖으로 나가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억지로 밖에 나가려면 나갈 수는 있다. 오늘처럼. 그러고선 지독한 반동에 의해 다시 돌아온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반동인지 가만히 살펴봐도 그냥 그게 자연상태다, 정도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운명'이나 '숙명' 따위가 아니라 '반동'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과학과 감정은 닮아 있다는 것. 내 감정은 열역학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아무리 데워놔도 온도는 떨어지고, 다시 데우기 위해선 다른 형태의 에너지가 들고. 유용한 에너지들은 무용해지고, 다시 유용하게 만들기 위해선 다른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점점 무질서해지고, 엔트로피만 늘어나고.
계를 확장시켜서 다른 사람의 유용한 에너지를 뺏어올까, 아니면 따뜻한 사람을 내 옆에 꼼짝없이 붙어있게 해서 평형상태를 만들어 버릴까, 하다가도 결론은. 나랑 똑같아질 그 사람은 무슨 죄야.
말이 길어졌다. 그래도 밖으로 나가자, 일을 하자. 안으로 들어온 시간만큼 밖으로 나가자. 밖으로의 반동 또한 분명 있을 거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