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17 도피처

2015. 12. 17. 22:46 from 하루 낱말

 연극사 시험이 끝나자마자 연속간행물실로 가서 2014년 문학동네 여름호와 가을호를 뒤졌다. 세월호 관련 글들을 읽으려고. 분명 읽고 또 읽었다. 편집위원의 서문도 읽었고, 박민규와 황정은과 김애란의 글도 읽었다. 그런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들어찬 것들이 증발하는 건 익숙한 일이긴 한데, 이렇게 바로 증발하는 건 너무하잖아. 지난주 목요일부터 상태가 이상해졌다. 글쓰기 선생님 때문에 약간 들뜬 탓도 있었고, 그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글을 쓰는 게 어려워졌다. 들뜸과 자학의 반복으로 애도에 대한 이야기를 망쳐버렸다. 의사 선생님한테 말했다. 저는요,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들으면 너무 괴로워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숫자를 적은 그래프를 그려줬고. ‘운명 같은’과 ‘막연한’이라는 단어에 까만색으로 색칠을 해줬다. 안 맞는 옷을 입은 듯한 그 느낌 또한 수라 씨가 고쳐야 할 부적절한 감정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행동은 하나도 고치지 못했다. 그 불편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건강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도 지금은 기억이 안 나. 


 새 글을 시작했다. 애도와 안티고네에 관한 과제는 아예 망쳐버렸으니깐. 망치지 않은 새 글을 자기만족용으로 쓰고 싶었다. 며칠 전에 떠오른 이야기. 우리가 애도했어야 할 사건들이 삶에 치여 지층 아래로 퇴적되고, 훗날 지진이 일어났을 때 ‘냉기‘의 형태가 되어 갈라진 지각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그래서 현재의 인간들이 과거의 사건과 조우하며 비로소 ‘애도’라는 감정을 온전히 체감하게 되는. 그런데 왜 머리가 안 돌아가고 진행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밥을 안 먹어서 그런 건가 싶으니깐 어서 밥을 차려야겠다. 설거지도 안 해놨고 도마도 식칼도 없지만 있는 걸로 대충 하면 되지. 머리가 아프다. 종강을 했는데도 찝찝함이 사라지질 않는다. 선생님은 피드백 메일도 안 준다. 지난주에 했던 말을 다 철회할 것 같다.


 아무리 봐도 나는 도피처를 사랑하는 인간이다. 도피처가 안식처로 변한다면 그 안식처를 밀어내고 또 다른 도피처를 찾아 떠날 인간이다. 내 도피처가 안식처로 바뀌지 않게 열렬히 모순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싶다. 이상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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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SIK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