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하다. 노트북은 누워있다. 같은 방향으로 누워 타자를 치는 오른팔이 아프다.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으로 남은 김치찌개를 밥 위에 뿌려 먹었다. 후식으로는 버터에 구운 식빵 두 장과 딸기를 먹었다. 딸기 위에는 어제 새로 산 자일로스 설탕을 뿌렸다. 입자가 고와서 어디든 잘 스며든다. 벌써 출출해졌는데 이젠 뭘 먹을지 걱정이다. 냉동실에 미역이 있는데 미역국을 해 먹을까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니까 이틀 후에 생일이다. 작년 생일엔 우울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생일은 목요일이었다. 전날 오후에 술 모임이 있었다. 연극원 전체가 모여서 통성명도 하고 술도 마셨다. 그때 알게 된 애들 중에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가는 사람은 몇 명 없다. 술김에 연락처를 물어보고선 다음 날 마주쳤을 때 인사조차 안 한 애들이 태반이다. 둥글게 나눠 앉아 게임을 했다. 맞은 편에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는데 첫인상이 좋았다. 보기 드문 동갑이라 좋은 것도 있었지만 그냥 사람의 분위기 자체도 좋았다. 흥 넘치게 게임하면서 나를 계속 지목하는 동생도 있었는데 귀엽고 예뻤다. 원래 홍익인간 같은 부류랑은 잘 안 맞는데 걘 왠지 좋았던 것 같다. 글을 잘 쓰는 애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맞은편에 있던 동갑내기 친구도 글 쓰는 애였다. 글 쓰는 애들한테는 왠지 신뢰가 간다. 그림 그리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나는 글 쓰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걔네한테 난 바보처럼 보일 거다. 흥 넘치는 연기과 애들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분위기를 업시켰다. 아무래도 나는 흥 넘치는 사람들이랑 안 맞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애들은 죄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들뜨더라도 가라앉아있는 사람과 눈 맞출 수 있는 정도로 들뜨는 애들. 게임이 끝나고 옆 자리에 또 다른 동갑 친구가 앉았는데 걔도 느낌이 좋았다. 걔는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내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몇 안 되는 인간들 중에서 또 몇 없는 동갑이라 그랬나보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못 친해졌다. 2학기 때 같은 글쓰기 수업을 들었는데 휴학해 버리는 바람에 친해지지 못했다. 그 외에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몇 있었는데 친해지지 못했다. 아프면 인간관계에도 차질이 생긴다. 친한 동생놈이 그 술자리에서 꽐라가 됐다. 그전에 술자리에서 실수하고 된통 혼난 적이 있던 애라 계속 신경이 쓰였다. 과제하러 과실에 먼저 내려가서도 신경이 쓰여서 몇 번 올라가 봤다. 원래는 아무한테나 정 안 주는데 그 동생놈한테는 정을 많이 줬던 것 같다. 지금은 연락조차 안 한다.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는 연락이 잘 안 된다.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만 챙기기도 벅차다. 과실에서 계속 과제를 하다가 11시가 됐다. 좋아하는 동생이 상담할 거리가 있다고 맥주나 마시자고 했다. 슈퍼에 가서 맥주랑 청하랑 과자를 샀다. 맥주는 아사히로 샀다. 예술극장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마셨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말이 통하는 동생이었는데 고민 거리가 많아보였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 자체가 건강거니까, 복잡한 눈으로 뭔가를 털어놓는 동생을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동생은 꾸준히 작업을 한다. 똘똘하고 사교적인 애니까 뭐든 잘 할 것 같다. 학교에는 아는 애들이 수시로 지나다녔다. 우리 학교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데 가라앉는 시기가 되면 최악의 단점이다. 자정이 지나 4월 3일이 됐고 내 생일을 아는 몇 명이 잠시 들러서 축하를 해줬다. 생일의 시작을 다른 사람과 보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같이 술을 마시던 동생은 왜 생일인 걸 말 안 했냐고 뭐라했고, 난 그냥 생일을 안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시간은 어이 없게 잘 가고 나이는 잘도 쌓이는데 나는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다, 스물다섯 살이 싫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이틀 뒤면 스물여섯 의 생일이다. 과거는 이토록 잘 기억하는데 미래는 하나도 안 보인다. 내 눈은 과거 뱡향으로만 달린 것 같다. 발전 없이 뒤로만 빠진다. 올해는 아마 더 우울할 거다. 억겁의 시간 속에서 잠시 이 모습으로 사는 건데, 생일 따위가 뭐가 대수냐고, 까놓고 보면 우울할 것도 없다고, 생일만 다가오면 괜히 불교 세계관이나 들먹거리면서 자위한다. 미역국은 오늘 말고 이틀 후 아침에 끓여야겠다. 그날 엄마랑 아빠가 일 때문에 올라오는데 마주하기가 싫다. 오랜만에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고 누군가를 만나야겠다. 4월 3일, 잠은 되도록이면 밖에서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