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잠잠하던 코끼리의 지랄병이 도졌다. 원인 제공은 내가 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 인해 생긴 코끼리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코끼리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사실 관계를 떠난, 말꼬투리 잡기 스킬을 시전했다. 사실에 말이 얹히고 감정이 얹히면 폭력이 된다. 나는 힘없이 밖에 나가 먹을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5년 전쯤에는 코끼리 때문에 매일 자살을 생각했다. 아, 6년 전에도 그랬고, 7년 전에도 그랬다. 생각해 보니 10년 전에도 그랬다. 더 생각해보니 작년에도 그랬다. 코끼리는 아빠만큼이나 트라우마의 집약체다. 상대 남자에게 미안하고, 어쩌면 태어날지도 모를 아기한테도 미안하지만 어서 빨리 결혼해서 이 집을 나갔으면 좋겠다.
스무 살 겨울, 코끼리에게 머리를 맞아 두피가 찢어졌다. 응급실에 가서 일곱 바늘을 꿰맸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코끼리는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많은 글을 썼다가 지웠다. 쓰다 보니깐 아프다. 잠잠해져 있던 트라우마들이 살아나려고 한다.
대학을 자퇴하고 등록금을 돌려받았다. 스무 살 때. 아빠 회사에서 나오는 학자금이 300만원 정도였기에, 나는 꽁으로 얻은 300만원으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려고 했다. 인도 여행도 생각했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빴던 엄마는 그 300만원을 집안 살림을 위해 썼다. 다음 해 여름, 코끼리는 다짜고짜 집으로 돌아와 코 성형수술을 해달라고 졸랐다. 아니, 졸랐다기 보단 협박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언제나 현명하지 못했던 엄마는 코끼리의 등쌀에 못 이겨 수술을 시켜줬다. 수술비용은 300만원 정도였고, 나는 내 등록금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도 이상한 사람이다.
경찰서에 들락날락거리면서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합의금'이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되면서부터 떠오른 생각이다. 강제추행을 당했던 그때, 만약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합의금을 받았던 거라면. 그 합의금을 나를 위해 쓰지 않고, 집안 살림을 위해 썼던 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엄마마저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일은 여기까지만 생각할래. 이미 너무 많이 떠올려 버렸다. 결론은, 조금 전 코끼리와 말다툼을 하면서 느낀 감정들은 순수한 그때의 감정이 아니었다는 거다. 20년 넘게 쌓여 온 감정의 뭉치들이었다. 나는 딱 그때만큼만 괴로워하면 되는 거였다. 언제나 적절한 만큼만 괴로워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