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소리가 사라질 때까지만 일본어 시험 공부를 미룰 것이다.
달팽이를 달팽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는 사소했다. 달팽이와 나는 비오는 날에만 밖으로 나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뛰지도 않고 앉지도 않고 천천히 걷기만 했다. 달팽이는 자신과 함께 걷는 나를 지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대개 현대아파트를 지나 반송초등학교를 지나 럭키아파트를 지나 반지동 사거리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러고선 늘 반지동 사거리에서 일분 이상을 멈춰 서 있었다. 오른쪽으로 빠질까, 왼쪽으로 빠질까. 아니면 직진을 할까. 우리는 언제나 고민을 했고 언제나 왼쪽을 선택했다. 그때의 왼쪽에는 '만남의 광장'이라는 커다란 광장과 낡은 주택가를 향한 느릿한 길이 있었다. 지금 그 곳에는 씨티쎄븐과 컨벤션센터를 향한 빠른 길이 번쩍이고 있다. 아마 지금 달팽이가 그 곳을 본다면 그 커다란 길이 그때의 왼쪽 길이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느릿한 길을 지나 봉곡 시장으로 들어섰다. 봉곡 시장에는 횟집이 많았다. 물고기들은 네모난 투명 상자 속에서 생사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중 눈에 띄었던 건 갈색 광어. 광어는 뻐끔거리면서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마침 검정색 승용차에서 내린 남자 무리는 역시 가을에는 광어지, 라고 큰 소리로 말한 후 횟집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광어는 계속 나를 바라봤고 나도 광어를 계속 바라봤다. 횟집 아줌마는 밖으로 나왔다. 달팽이는 나의 손을 잡고 까치아파트를 향해 발을 돌렸다. 까치아파트는 늘 추웠다. 산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까치아파트와 함께 있는 해는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우리의 신발이 축축해지고 바짓단도 축축해졌을 때쯤 달팽이는 말했다. "돌아가자." 나는 말없이 달팽이의 손을 잡고 방향을 틀었다. 비는 조금씩 그치기 시작했다. 나는 눅눅한 양말이 싫어 양말과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않아 물컹한 무언가가 발에 밟혔다. 그건 지렁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터져버린 지렁이를 가만히 쳐다봤고 달팽이는 나를 불렀다. "지렁아. 가자." 지렁이는 터진 채로 꿈틀거리며 앞을 향해 움직였고 나는 발바닥에 묻은 지렁이의 내장을 급하게 양말로 닦은 후 달팽이를 향해 걸었다.
달팽이는 아직 잘 지낼까. 그런데 그 달팽이는 없다. 사실 달팽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지렁이는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는 동안 쇳소리는 사라졌고 나는 이제 일본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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