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없다. 그게 문제다. 이대로 살다간 아무 기억 없이 오랫동안 살아있을 것만 같다. 기억이 있으면 짧게 살 수 있지만 기억이 없으면 짧게 살 수 없다.
시끄러운 예능을 틀어두고 한 달을 살았다. 손바닥만 한 화면 안에서 사람들은 웃고 떠들었다. 왁자지껄하게. 장난을 치고, 게임을 하고, 서로를 괴롭히고, 그러나 악의는 없이. 10년 전 사람들의 소란을 보면서 추억이라는 걸 느꼈다. 나와는 아주 먼 사람들이 나와는 관계없이 뛰어다니는 걸 보면서 왜 추억 같은 걸 느꼈을까. 그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공유할 만 한 추억이 없는데.
거대한 산에 새겨둔 부처의 얼굴, 단단한 바위를 깎아 만든 부처의 형상, 달을 보기 위해 만든 건축물, 죽은 사람을 모셔두기 위해 쌓아둔 흙. 그 사이를 달리는 사람들. 내가 걷던 거리, 길을 잃어 걷던 거리. 불상을 보기 위해 산에 올랐을 때 지진이 나면 어떡하지.
큰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꺾으면 나오는 게스트하우스. 천막. 바비큐 용품들. 낚시 의자. 숯. 고기와 상추와 쌈 채소와 맥주. 호일 불판 안에서 익어가는 고기. 연기. 죽겠다, 죽겠다, 여기에 계속 있다간 병원에 가야 한다, 우는 소리. 천막 바깥에서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 안. 담합. 여길 나가서 술을 마시자. 너는 어디에서 왔니, 거창, 군포, 서울, 광주, 광명. 또 어디더라. 내일 없이, 내용 없이 그냥 꺼내는 말. 내가 싫어하는 술자리. 시끄러운 소리. 누나 진짜 스물넷 같아요, 오, 고마워, 역시 여자들은 칭찬을 좋아해. 아닌데. 그래도 끝까지 너는 스무 살 같아, 라는 말은 하지 않기. 역시 시끄러운 술자리는 싫어. 그래도 소맥은 맛있었다.
그게 끝. 아니다, 왼쪽 손목에 걸린 염주가 있다. 옴. 태초의 첫 음절. 옴이라는 글자를 타투로 새기려고 했지만 결국 손목에 걸어두네. 그냥 걸어두기만 하네. 슬프거나 화나거나 견딜 수 없을 때 손끝으로 옴을 만져야지. 음각으로 된 옴. 옴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작은 소원.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소원. 그 소원을 쌓기 위해 얼마가 걸렸더라. 10분이었나, 20분이었나. 20분짜리 소원은 아마 지금 쯤 무너졌겠지. 그래도 괜찮다. 금칠 된 불상을 봤으니깐 괜찮다.
산은 예뻤고. 역 앞의 까마귀 떼는 무서웠고.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까마귀 떼를 본 건 처음이었다. 전선 위에 다닥다닥 올라타 있는 까마귀들. 무서워, 무서워, 소리 내며 달리고. 밀면은 맛있었다. 고기도 맛있었다. 종소리. 1000원을 내야만 칠 수 있는 종. 나는 종을 치지 않고, 남이 친 종소리를 듣기만 했다. 때를 맞춰 소원을 빌었다.
토스트기에서 푱, 하고 나오는 식빵. 나무 그릇 위에 올리고 잼을 바르고 계란 후라이를 얹고. 커피는 G7. 사과 두 조각. 아침 식사. 간식으로는 찰보리빵.
일주일 전의 기억도 이 정도로 밖에 옮기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기억의 양이 적어야 편하게 살 수 있다.